그가 죽었으나
말씀: 히브리서 11:4b요절: 히브리서 11:4b
바른 희생물, 바른 예배에 대해 올바른 본을 세웠던 믿음의 선구자 아벨은 세상에서 그 육신의 생명이 가장 먼저 죽은 자요, 땅에 묻힌 첫 번째 사람입니다. 그가 왜 죽었습니까? 늙어서 죽은 것도 아니고,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렸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와 그의 희생물이 하나님께 받아 들여지고, 의롭다는 증언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제 가인에게 살해 당했습니다. 가인은 왜 동생 아벨을 죽인 것입니까? 돈을 노린 것도 아니고, 상속 분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토 분쟁이나 왕위나 서열과 같은 권력 다툼이 있있던 것도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 그는 저 사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형제를 죽였으니 무슨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 행위는 악하되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롭기 때문이라.](요일3:12). 가인의 살인 동기는 영적 문제였습니다. 세상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반적인 살인 동기와는 달리 하나님, 희생물, 의, 경배와 같은 영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사악한 자 즉 마귀에게 속했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처음부터 살인자입니다(요8:44).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누구를 죽입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를 죽입니다. 의로운 자를 죽입니다. 여기에는 부모, 부자, 부부, 형제라는 가족도 없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들이리라.](마10:36)는 말씀대로입니다. 가인은 육신의 형제인 동생 아벨이 의롭다는 이유로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로마인들의 손에 예수님을 넘겨 주어 죽게 했습니까? 간단합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사악하고 예수님이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죄 문제를 환경이나 교육이나 유전이나 심리적 문제로 돌립니다. 어릴 때의 가정 환경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같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들의 환경에는 가인과 아벨은 같은 부모를 두었습니다. 유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동일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종교가 다릅니까? 같은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같은 시각에 하나님께 희생물을 들고 나왔습니다. 겉보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의 차이는 영적인 것이요, 내면적인 것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유일한 차이는 ‘믿음’이었습니다. 가인은 종교적인 사람이요, 자기 의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구원하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 열매 맺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성품이나 인격이 훌륭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의 인간적 성품이나 인격이 결코 형 에서보다 나았다고 할 수 없듯이, 아벨의 성품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힘이 가인보다 나았던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땅을 가는 농사꾼이었던 가인이 양을 치는 아벨보다 훨씬 더 부지런하고 고된 일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인간적인 성품이나 노력이나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고, 가인은 불신으로 인해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벨을 일컬어 ‘의인 아벨’(마23:35)이라고 하셨고, 히브리서 기자 역시 ‘그는 의로운 자였다’(히11:4)고 말합니다. 아벨이 가진 의는 자신의 노력으로 차곡 차곡 쌓아 올린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의는 ‘믿음의 의’였습니다. 아벨은 아버지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태어났고, 죄의 본성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습니다(롬5:12). 에덴의 낙원에 살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그가 의롭게 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희생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고(창3:21), 가인과 아벨에게 죄를 속할 수 있는 희생물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죄가 전달되고,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고, 의롭게 되는 길을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고전15:22). 하나님은 이 진리를 이미 아담이 죄를 범한 순간부터 제시해 주셨습니다. 에덴의 동산에서 ‘여자의 씨를 통한 구속’(창3:15)을 약속하셨습니다. 가인과 아벨에게는 장차 세상 죄를 제거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모형으로 제단에 ‘양’을 바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벨은 말씀을 듣고 믿었는데 그 믿음의 증거가 바로 ‘양의 첫 새끼’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이 직접 손으로 농사를 지은 ‘땅의 소산물’들을 가지고 주님께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잃어버린 죄인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하나님께 나아와 제단에 희생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둘 다 하나님께 나아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와야 하는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받은 말씀에 대한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대신 자신의 행위,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얻은 ‘열매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는 사람의 노력과 수고와 헌신의 결과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시도합니다. 종교는 믿음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즉 어린 양의 죽음과 피를 통한 희생을 드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대속의 죽음, 대속의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의 사면이 없느니라.](히9:22)는 말씀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영원한 진리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오직 피로써만 혼의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레위기 17:11,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레17:11). 피가 없는 희생물을 제단 앞에 들고 나온 가인은 오늘날 피의 속죄를 거부하는 모든 인본주의 종교인들, 이교도들의 선구자였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고(골1:14, 엡1:7), 그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며(요일1:9),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로부터 씻으십니다(계1:5). 가인은 어린 양의 피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의 의를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고, 아벨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를 ‘가인의 길’(유1:11)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벨의 믿음 대신 가인이 행한 대로 여전히 그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히11:4). 아벨은 믿는 자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참된 예배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 자들’(요4:23-24)을 찾으십니다. 경배(예배)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행위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믿음의 삶은 단을 쌓는 예배의 삶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은 다 하나같이 ‘주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은 희생물을 바치며 주님을 경배하기 위한 곳입니다. 반면 롯, 이스마엘, 에서 등이 주께 제단을 쌓았다는 구절은 아무리 찾아 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경배는 믿음의 증거일 뿐 아니라 믿음과 동반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경배할 때 성장하고 강해집니다. 경배는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원인과 진단을 제시하는 많은 전문가들이 있지만 실로 중요한 문제인 ‘예배의 경시’란 점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예배의 감격이 없고, 예배를 통한 주의 임재를 누리지 못하며,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풍성한 영적 선물들과 빛 비추임이나 신성한 경외감 등이 전혀 없습니다. 채 한 시간이 되지 못하는 동안 프로그램대로 찬송, 기도, 설교, 헌금, 축도 등의 순서대로 작은 의식을 치르는 것이 예배의 전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중요성이 말로는 강조되지만 이는 예배 프로그램의 참석의 중요성이란 뜻이 전부입니다. 아벨의 믿음은 주님을 경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들 가운데 첫 새끼들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따로 이렇게 드리라는 율법이 제정된 시대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잠언 3:9에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첫 열매로 주를 공경하라.](잠3:9)는 말씀대로입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내어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주님께 경배했기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에 관심을 보시고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증거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태우는 것입니다. 성경적 예를 몇 곳 찾아 보겠습니다. 레위기 9:24,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 헌물과 기름을 사르매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더라.](레9:24). [다윗이 거기서 [주]께 제단을 쌓고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려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 헌물 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대상21:26). 그래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번제 헌물과 희생물들을 사르고 [주]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니라.] (대하7:1). 엘리야 역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며 갈멜 산에서 바알이 제사장들과 누가 참 하나님인지 대결했습니다(왕상18:38). 아벨이 단 위에 자신이 가져온 양의 첫 새끼를 드리고 피를 흘렸을 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헌물과 그 기름을 태웠을 것입니다. 반면 가인의 제단 위에 놓인 제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롬12:1-2)로 드리고, 찬송을 드리고(히13:15), 구제와 연보를 하고(빌4:10-18), 선행을 하고(히13:16), 상한 심령으로(시51:17) 감사와 기도(시141:2)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 불을 붙여 주십니다. 아벨의 믿음은 고난 받는 믿음입니다.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히11:4b). 아벨이 믿음으로 희생물을 드린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에는 그만한 대가를 치릅니다. 주님께서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말씀하시며,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이는 하늘에서 너희 보상(報償)이 크기 때문이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은 의를 행함으로 인해 핍박을 받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기복주의를 조장하는 교회들의 설교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성도들에게는 세상에서 영광과 칭찬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박해가 따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딤후3:12). 이것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모두 믿음의 좋은 평판을 받은 장로들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파라오와 모세, 에서와 야곱과 같이 짝을 이루는 불신자 셋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마귀를 예표합니다. 파라오는 세상을 예표합니다. 에서는 육신을 예표합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산 아벨을 죽였습니다. 파라오는 믿음으로 산 모세를 대적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마귀, 세상, 육신이란 3가지 원수에 둘러쌓여 있으며 호시탐탐 죽이려 합니다. 이곳 미국에는 기독교가 주류이고,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난당한다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죽는 것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 시대이다.” 믿음의 생활은 결코 평안한 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있는 불을 치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불을 통과할 때 힘을 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강과 바다에 배를 띄우시는 대신 그 속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그 때 물속을 가로 질러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눈 앞에 보이는 환경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하면 결코 믿음의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벨의 믿음은 말하는 믿음입니다.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히11:4b). 믿음은 일을 합니다. 믿음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아벨이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무슨 유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스데반처럼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고 선포합니다. 아벨의 피는 하늘의 주님께 말하고 있습니다(창4:10). 우리는 계시록 의로 인해 죽임을 당한 자들이 하늘의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섯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붙잡은 증언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자들의 혼(魂)들을 보니 그들이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오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사 우리 피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는 일이 얼마나 더 지속되리이까? 하매] (계6:9~10). 아벨의 호소나 환란 시대의 순교자들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그들은 의를 행함으로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히11:4b). 이는 아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13,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영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 사람은 누구나 진실로 믿으면 말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세상은 믿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때리고, 가두고, 죽여도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교회사의 순교사화를 보십시오. 세상은 믿는 자들이 말하지 못하도록 고문을 가하고, 재산을 빼앗고, 옥에 가두고, 매질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을 합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말을 합니다. 죽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말을 합니다. 이는 믿는 자들이 말이 많은 수다쟁이란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말하지 않을 수 없는가? 첫째, 믿는 자들 안에는 속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권하는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엘리후가 [내게는 /말할/ 내용이 가득하며 내 안에 있는 영이 나를 강권하는도다.](욥32:18)란 고백 그대로입니다.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가득할 때 우리는 입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할 뿐 아니라 세상에 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요, 증언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주님을 증언하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우리 자신을 강권하는 것이 제일 큰 이유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은 마치 술에 취한 자들이 술 기운으로 계속해서 말을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말하게 됩니다. 이는 사도행전 초기에 나오는 사도들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둘째, 우리 속에 타오르는 말씀의 불길 때문입니다. 대언자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그는 대언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날마다 조롱을 받고, 비웃음을 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그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 같아서 내 뼈 속에 사무치니 내가 참기에 지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노라.] (렘20:9).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속에서 말씀의 불길이 강하다면 그는 입을 열어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쟌 웨슬레 목사님은 평생동안 지구를 몇 바퀴를 돌만큼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내 안에는 꺼지지 않는 설레이는 불 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불타는 열정이 평생토록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하게 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언제 우리 마음 속에 말씀이 불 타오르는 줄 아십니까? 오순절 교회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성령의 불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뜨겁게 되는 것은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말씀을 깨닫게 될 때입니다. 시편39: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우므로 내가 생각에 잠길 때에 불이 붙으니 이에 내가 내 혀로 말하기를,] 누가복음 24:32,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셋째,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시기 때문이라.](고후5:14a).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쏟아 부어진 바 될 때 그는 입을 열어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고,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이것이 전도의 동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증언하고 자랑합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생각과 말에는 사랑의 대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 역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넷째,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6). 자원하여 할 때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순간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중에 아무도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하지 않고,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돌들이 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즉시 소리를 지르리라](눅19:40).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이 시대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돌들이 외치는 시대입니다. 테잎, 씨디, 방송 등 모두 마그네틱(돌)에 음성 정보를 담아 기계가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말 할 수 없습니다. 성전에서 계시를 받았던 사가랴는 믿지 않으므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눅1:18-23). 하지만 마리아는 믿으므로 마음 속에서부터 찬양이 울려 나왔습니다. 아벨은 자신의 입으로 한 증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그가 흘린 피, 그가 드린 희생물은 인류 6000년 역사를 관통하며 믿음의 본으로 남아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바른 예배란 무엇이며 의인이 고난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등등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벨의 인생이 보여 준 것을 보십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