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믿음이란 무엇인가?


말씀: 히브리서 11:1
요절: 히브리서 11:1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한 번씩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감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믿음은 실체요, 증거입니다. 믿음은 관념이나 허상을 정신력으로 내 안에 내재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substance)입니다. 바라는 것(hoped for)는 미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미래의 있을 일들에 대해 말씀을 들었고 그것들을 믿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9:10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곧 대언의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대언(예언)은 미래의 일입니다. 몸의 부활, 주님의 오심, 들림, 변화 받는 것, 심판, 천년 왕국,...모두 미래의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입니다. 장차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그 실체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음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바라는 것(소망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영적인 몸, 하늘의 유업과 상급 등은 성도들이라면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마주 보는 것도 우리가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실체가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만 관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로마서 4:17에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미래가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장래 일이나 현재 일이나 구분이 없이 다 그 분 눈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에는 보였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그분을 믿으며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즐거워 하니](벧전1:8). 이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성령은 존재하시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도성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은 우리의 눈과 이성으로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특별 계시가 필요합니다. 이 특별 계시가 바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는 보이는 것은 잠깐 있을 뿐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우리 안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1의 믿음은 결국 기록된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author)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히12:2). 큰 강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원천지 곧 강의 발원지가 있듯이 모든 믿음의 발원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말로 ‘창시자’라고 번역한 이 단어는 킹 제임스 성경에서 author입니다. 모든 작품의 원천이 저자에게서 나오듯이 모든 믿음은 예수님에게 나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믿음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에는 우리가 더 이상 훈육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니](갈3:25).

성경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8, *딤전4:6). 복음을 전할 때 선포하는 말씀은 그 자체가 바로 믿음을 주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신 인간의 지혜로 가르치는 말을 동원해서 예수를 변증하고 기독교를 옹호하고 설득시키려 한다면 듣는 사람의 지성과 지적 동의는 얻을 수 있어도 구원하는 믿음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사람의 지혜에 따른 유혹하는 말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한 것이니](고전2:4)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말씀은 말씀 자체가 믿음의 씨앗이 되며, 믿음을 생성해 주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으로 정확한 복음의 선포 없이 믿음은 생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또한 우리가 이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니 곧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되느니라.](고전2:13).

성경은 믿음을 생산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믿음을 생산하는 옥토와 같습니다. 누가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간구한다면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여러분 성경을 읽으시고 암송하십시오. D.L Moody 목사님은, “하나님께 더 강한 믿음을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했지만 믿음은 오지 않았다. 어느 날 로마서10:17 말씀을 읽고서 믿음을 증가시키는 법을 알고 성경을 읽었더니 믿음은 저절로 증가되었다.”고 술회하셨습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진리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성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언제나 말씀을 곁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구하러 저 하늘이나 깊은 산골이나 땅 아래나 바다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나니 그러므로 네가 그것을 행할 수 있느니라.] (신30:14).

믿음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고전12:9).-은사.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faith)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전에 저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즉 faith는 believe가 아닙니다. faith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believe는 나의 의지적 결정입니다. 복음을 들을 때 나의 지각과 이성을 사용해서 의지적 결정을 통해 예수를 믿을 때(belive), 그 안에 성령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여기에는 택함과 선택의 교리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믿는 자는...(whosoever believeth in his name/him....)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지만(belive) 믿음(faith)은 없습니다.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잘 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belive) 떠느니라.](약2:19). 모든 불신자는 뭔가를 믿습니다. 하지만 believe(믿는)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faith(믿음)가 없습니다. 믿음의 저자(author)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는데 어떻게 믿음(faith)이 올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믿음의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을 듣고 믿으면(believe) 성령께서 그 즉시 faith(믿음)를 선물로 주십니다. “마음으로 믿어”(believeth in his heart) 구원에 이르고(롬10:10).

**belive와 faith의 차이에 주목할 것.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faith)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believe)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는 하나도 없느니라.](갈5:16). the faith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 어떤 사람은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 된다고 생각하여 모든 일에 믿음, 믿음을 외치며 분별없는 짓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을 알라딘의 요술램프로 생각하는 “믿음만능주의”에 빠진 사람이 이외로 많이 있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쓸데없이 만용(蠻勇)을 부렸다가는 망합니다. 믿음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하라.](롬12:3).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믿음은 왜 그렇게 중요하며,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얻을 수 있는지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믿음만 있으면 만사형통할 수 있다거나,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라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impossible to please God)](히11:6). 또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하나 늘 죄를 짓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것은 죄니라.](롬14:23) 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고 싶은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우리의 믿음을 크게 하여 주옵소서”(눅17:5)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에게 이르기를,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겨자 씨의 크기가 아니라 비율입니다. 눈에 보일까 말까한 작은 겨자씨가 심기었을 때 1-2m 가량 크기로 자라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적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맺는 성장과 힘은 폭발적인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우리 안에서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의 씨앗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몇 가지 단계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첫째, no faith - 평소에는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어떤 특정한 문제 앞에서는 전혀 믿음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장래 문제, 자녀 문제, 교회 문제 등... 사람마다 약점을 보이는 사안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는 어떤 사람이 마귀들린 아이를 데리고 오자 제자들은 전혀 손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그를 내쫓지 못하였나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음이 없음이로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 너머로 옮겨가라, 하면 옮겨 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마17:19-20).

둘째, little faith -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실패하는 경우를 적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마음 가운데 확신과 충만함으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힘든 환경과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두려움에 빠져서 허우적댑니다. 이런 믿음을 성경은 적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바다 한 가운데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만일 주시거든 내게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그분께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가려고 물위로 걸어가되//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두려워 하여 가라앉기 시작하니라. 이에 그가 소리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14:28-30). 우리는 이런 베드로의 경험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시작은 믿음으로 하지만 마귀가 조성한 여러 가지 환경과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선합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시작하였고, 주님께서 명하신 일이라고 해서 모든 환경이 형통하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일일수록 더욱 어렵고 힘든 것이 성경적 법칙입니다. 수많은 의심과 시험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믿음은 연단됩니다. 주님은 즉시 손을 내미사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끊임없이 [믿음의 적은 자들아]란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런 책망을 받으면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납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늘 염려 가운데 삽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하나님과 세상, 성령과 육신, 믿음과 행위 사이에서 저울추처럼 왔다갔다 하며 삽니다. 먹고 입을 것이 염려된다면 그는 믿음이 적은 사람에 해당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시지 아니하겠느냐?](마6:30).

셋째, great faith - 큰 믿음이란 오직 말씀 하나로 모든 것이 족한 믿음입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은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하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오직 말씀만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마8:8)했습니다. 백부장은 말씀의 능력을 믿었고, 말씀이외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을 큰 믿음이라고 합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에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사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큰 믿음은 결코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나의 기도는 항상 “주여 한 말씀만 해 주옵소서!”로 족합니다.

큰 믿음이란 환경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말씀에 따라 자신을 고쳐가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은 모두 환경과 시련을 이겨낸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어떤 믿음의 영웅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처절했던 한 여인의 승리를 담은 기사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딸이 마귀에게 몹시 시달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게 나와 소리질렀습니다.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나이다, 하되](마15:22). 딸을 향한 애끓는 어미의 모정으로 외치는 그녀의 간구에 닥친 가장 큰 시련은 냉담한 주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주님의 침묵보다 더 큰 시련은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여자에게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마15:23a). 다급하고 애끓는 간구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성도들은 누구나 낙담하고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응답이 속히 오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해 본 적이 없습니까? 이 여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닥쳤습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이라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 주님께 중보해 주면 좋을텐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만 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간청하여 이르되, 그녀가 우리를 따라오며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매] 제자들은 더 야멸찼습니다. 12제자 중 누구도 자신에게 한 마디의 동정이나 위로는 고사하고 연민의 눈빛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는 문제에 대해 주위의 형제들이 위로와 도움은 고사하고 힘빼는 소리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은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태산이요, 설상가상이었습니다. 침묵하시던 주님의 응답은 NO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비벼대 볼 언덕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기사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먼저 이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고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왜 이토록 모질게 대하시고 계실까요?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데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주님은 여인의 잘못된 기도를 고쳐 주시고 계십니다. 22절과 비교해서 읽어 보십시오. 유대인이 아닌 이방 여인이 다윗의 자손을 찾은 것은 기도의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과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계속되는 침묵이나 NO로 응답하실 때, 우리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NO란 응답에는 올바른 가르침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나와의 관계성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신분이 이스라엘 백성인 것처럼 주님께 구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녀가 와서 그분께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나를 도우소서, 하니](마15:25). 이제 여인은 주님만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그분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제는 되었겠거니 생각했지만 주님은 다시 한번 NO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매] 주님은 여인의 신분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정당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백성”이 아니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께 정당하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더럽고 추한 죄인이요, 하나님의 원수된 자였기에 하나님께 이것 저것을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 줘야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하면 주님이 이유없이 무조건 도와 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은 이제 한 번 더 성숙의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이르되,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제 여인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자격조차 없는 신분이요, 존재란 사실을 깨닫고 인정했습니다. 지성인으로 자부하는 현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과정 가운데서 주님이 주시는 시험을 이겨낸다면 큰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받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바로 그 시각부터 그녀의 딸이 온전하게 되니라.](마15:28)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죽음은 개와 같던 저희들의 신분을 모두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아들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여인처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기도하거나 “개”라고 고백하며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 자유롭게 부르며 나의 필요를 아뢰기만 하면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저는 저희 교회 성도 모든 분이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기도 제목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비참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적으로 깊이 병든 그리스도인의 증상은 무릎을 꿇고 기도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수요 기도 모임에 나와서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은 여러분의 privacy를 공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모두 성경적으로 훌륭하게 커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잃어버린 혼들에 대한 연민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넘칩니까? 여러분의 가족, 친지, 친구들은 모두 구원받았습니까? 그들은 모두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 출석해서 양육 받고 있습니까? 왜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충분히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왜 기도를 부탁하고 서로를 위해 그런 기도를 나누지 않습니까? 왜 형제들의 필요를 서로 돌아보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기도를 하고자 하는데 수로페니키아 여인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 제목은 끝이 없습니다.

넷째, 약한 믿음(weak faith) - 처음부터 큰 믿음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믿음이 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에 능숙하지 않는 한 믿음은 절대 강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돌보고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롬14:1). 반면 강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해서 영원히 믿음이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에서 벗어나고 타락할 때 믿음은 약해집니다. 시간이 없어 성경을 못 읽을 때, 정신없이 바삐 하루가 지나 기도를 못할 때, 일이 많아 교회 집회를 빠질 때 여러분의 믿음은 이미 많이 침식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다섯째, 거짓없는 믿음(unfeigned faith)- //꾸며내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며 자라납니다. 순수한 보존된 말씀의 씨앗이 내 안에 뿌려지지 않았다면 나의 믿음은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1:5).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믿음을 하나님은 헛된 믿음이라고 하시며, 사람들은 거짓된 믿음(가짜)이라고 합니다. Faith, it works. 성경에는 수많은 명령이 있습니다. 명령에는 복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명령은 마음으로만 순종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은 몸의 복종, 즉 행동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없는 복종을 율법주의라고 부르며 경계하는 동시에 행동으로 보여주는 몸의 복종이 없을 때 위선이라고 하며 주의해야 합니다.

일찍이 오늘날처럼 믿음이란 말이 남용되고 오용된 예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고후13:5). 여러분 안에 믿음이 있습니까?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것은 죄니라.](롬14:22a-23b)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감정적 흥분이나 감화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기록된 감정이나 환경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적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있어야 하며, ‘믿음의 근거’가 있어야 하고, ‘믿음의 증거’가 있어야 하며, ‘믿음의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망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기록된 말씀입니다. 믿음의 증거는 내 안에 계신 성령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혼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1,2절을 보십시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히1:1,2). 저와 여러분이 성경을 가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말라...](히12:25).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지금까지 들은 것들에 더 열심히 주의를 기울여 언제라도 그것들을 흘려 보내지 말아야 하리라.](히2:1).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신약의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행16:30)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의지가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써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 믿음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이 생겼으면 이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믿음의 생활의 목적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주님을 무시하고 살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주님께 매달리는 그리스도인은 원하는 기도 응답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평소에 아버지와 불화한 자식이 갑자기 어려울 때 부모님에게 도움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스승과 관계가 좋지 않는 제자는 심도 있는 학문을 전수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성이 좋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속히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믿음은 자라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성경적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나의 지성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나의 감정은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열망하며, 나의 의지는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려는 전인적인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자신의/his)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이는 신약 성경에서 무려 세 번이나 인용된 삼겹줄과 같은 말씀입니다(롬1:17, 갈3:11, 히10:38).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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