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지옥이 이 땅 아래에, 다시 말해 지구 내부에 있다고 아주 평이하게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어 ‘지옥’은 말씀, 하나님 같은 용어만큼이나 성경적인 개념이 담긴 무척 잘 만든 말입니다.
그들이 땅을 파고 지옥으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그들을 붙잡으리라. 그들이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들을 끌어내리리라. (암 9:2)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내가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시 139:8)
(킹 제임스 이외의 모든 성경들은 구약에 지옥이라는 단어가 사라졌습니다. 전부 무덤, 음부, 스올 등으로 변개! 이 치명적으로 중요한 영적 진리를 다 가려 버린 것만으로도 가짜 성경은 당장 쓰레기통으로 던져야 합니다.)
땅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로 지구 내부에 빈 공간이 있는지는 현대 과학으로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그저 지진파로 맨틀, 외핵, 내핵 같은 것만 파악하고서 지구 내부는 엄청나게 뜨겁다는 것 정도밖에 모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성경과 매우 일치하는 관측 결과이지요. 다만, 정말 땅껍데기(지각)만 벗겨내면 맨틀에서부터 지옥이 바로 나오는지, 아니면 외핵/내핵 정도는 돼야 하는지는 여러 문헌을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던 요나를 기억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이적을 요나에다가 비유했을 정도로 요나는 성경적 예표가 매우 큰 인물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그는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단순히 기절해 있거나 말똥말똥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라, 죽었고 지옥까지 갔다가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 나왔습니다.
이르되, 내가 내 고난으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내 말을 들으셨고 내가 지옥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욘 2:2)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마 12:40)
구약성경에서 큰 물고기라고 나오던 녀석은 바로 고래였다고 예수님께서 보충해 주셨습니다. 요나는 죽은 직후, 물고기 뱃속에 있던 자신의 혼이 점점 바다 깊숙한 곳으로 하강하고, 바닷물 밑바닥보다 더 가라앉다가 지표면을 뚫고 지옥에까지 이르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묘사가 요나서 2장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사흘 동안 지옥에 갔다 오셨다고 말하면, 우리나라 교회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행 2:27. 앞 구절의 주어, 문맥을 파악해 볼 것)
정체 불명의 이상한 신앙 고백인 사도신경에조차 영어 원문엔 그분이 지옥에 가셨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이 문장은 삭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시지 않고서야,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몇 번이고 반복하신 분이(요 4:14, 7:37 등), 십자가상에서 갑자기 왜 “내가 목마르다”(I thirst.)라고 갈증을 호소했겠습니까? (요 19:28)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뜨거운 불지옥에서 저주와 형벌을 감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도, 예수님도 모두 죽었다가 지옥까지 갔다 온 후 살아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옥은 실질적인 고통의 장소입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 (눅 16:23-24)
우리는 유일하게 실존 인물의 실명까지 거론되는 부자와 나사로 얘기가 비유라고 믿지 않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물 찍어서 좀 적셔 달라는 애원과, “I thirst.”를 한번 오버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병원, 특히 치과에 가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고 싫어합니다. 스케일링할 때의 그 고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 ㅜㅜ 제가 만약 불신자였고 누군가가 제게 “치과에 안 가는 것 이상으로 지옥엔 절대 안 가야 된다”고 말을 꺼내고 복음을 전한다면, 저는 최소한 동기 부여를 느끼고 뭔지 말을 들어 보기는 하겠습니다. 더구나 마취도 없이 수술을 해야 하고 과거 광견병에 걸린 부위를 불로 지지던 시절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런 처방은 안 받았겠습니다.
지옥은 치과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장소이며, 인류 역사상 행해졌던 그 어느 잔인하고 처참한 고문이나 처형 방법보다 더 큰 고통을 1분, 1시간, 하루, 1년, 100년도 아닌 영원무궁토록 당해야 하는 곳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들의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로다. (중략) 누구든지 밤이나 낮이나 안식을 얻지 못하리라. (계 14:11)
그 날들에는 사람들이 죽음을 구하여도 찾지 못하겠고 죽기를 바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계 9:6. 이 구절은 물론 지옥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대환란 문맥이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가 않는 때가 있음을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이기 때문에 소개합니다.)
유대인 학살 독가스실, 일본군의 731 부대 생체 실험, 일본 여고생 시멘트 사건, 난징 대학살, 폭스의 순교사화에 기록된 중세 종교 재판 등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이 지옥에 대해서 가장 생생한 예표를 보여주시는 곳은 단연 화산입니다. 성경이 묘사하는 불과 유황 그 자체이죠. 또한 포항제철 용광로(마 13:42) 같은 곳도 아주 좋은 비유입니다.
하지만 이런 걸 일반 사람이 현장으로 직접 보기는 쉽지 않으니, 다른 예를 들자면 영화 타워링이나 대연각 호텔 같은 처참한 화재 현장에 비유할 수도 있고(특히 밤에 발생한), 사우나에다가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온이 섭씨 90도~100도대인 사우나에만 가도 불과 몇 분 후 금세 땀이 나고 혀가 쑥 나오고 괴롭습니다. 바로 그게 지옥이라는 용액을 1000, 10000분의 1 이상으로 희석한 후 솜방망이에 묻혀서 정말 맛만 잠깐 본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불은 사람에게 공포감을 주고 사람을 통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고문하면서 살갗을 인두로 지지거나, 아니면 아예 화형에 처하거나. 화상은 다른 부상보다도 더욱 고통스럽고 흉측하기 그지없는 흉터를 남기며, 평생 절대 당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상처입니다. 더구나 안면 화상은 사람 인생 말 그대로 끝장 냅니다.
그리고 그 불의 최종 완전체가 바로 지옥입니다.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4, 46, 48. 변개된 가짜 성경들은 지옥의 무서움을 3회나 반복하여 경고한 44, 46절을 삭제함.)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막 9:49)
그 반면 지옥이 아니라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간 주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하든 능지처참을 당했든 그 어떤 방식으로 뼈도 못 추리게 처참하게 죽었더라도 생명의 부활로 부활하고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내가 생명이고 부활이라는 말씀은 정말 위대하고 어마어마하며, 인류 역사상 무수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참 생명을 선사한 엄청난 말씀입니다.
교리적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지구 아래에 있는 지옥은 훗날 불 호수(계 20:14-15)로 대체됩니다. 텅 비어 있던 지옥에 카인이나 비슷한 연배의 죄인이 지옥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후, 지옥은 아담 이래로 죄 가운데 죽은 수백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커져 왔습니다. 지구가 차츰 더워지고 있는 이유도 이산화탄소 온실효과 때문이 아니라 아래의 뜨거운 지옥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후략) (사 5:14)
지옥과 멸망이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는 것 같이 사람의 눈도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느니라. (잠 27:20)
- 카인에 대해서는 유 11 참고. 신약 성경에서 부정적인 악인으로 언급된 구약 인물은 지옥에 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발람도 마찬가지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었기 때문입니다.
- 그 반면 구약에서는 죄 짓고 사고 친 게 잔뜩 기록된 사람이라도, 신약에서 입 싹 씻고 의인이라고 좋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롯, 삼손, 다윗 등.
-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회 성도로서 신약 성경에서 부정적인 최후가 기록되어 있는 인물은 지옥 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 데마 등.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교리도 있거니와, 이런 사람이 지옥에 갔다면 오늘날의 교인들 중에서도 구원받을 사람 별로 없습니다.
죄 가운데에 죽은 사람들은 지옥에서 이미 불에 절어서 시꺼멓게 타고 말 그대로 벌레처럼 오그라든 흉측한 모습으로, 온 세상이 끝난 후 백보좌 심판석에서 하나님 앞에서 최후 변론을 하게 됩니다. 사 66:24는 직접적인 그 문맥은 아니지만, 저 장면이 어떨지에 대한 좋은 힌트를 제공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몰라서 예수 안 믿었다”, “나는 평생 한 치도 죄 안 지었다. 다른 인간들도 그 상황에서 나만큼만 살라고 해 봐라!”, “내가 저 놈만 아니었으면 예수 믿었다” 등등 수많은 변론이 오고 가고, 이때는 구원받은 사람들도 참관하여, 살았을 때 예수쟁이 행세 똑바로 못 한 것, 그리고 자기 가족, 친구들이 최후 선고를 받고 영원히 불 호수로 이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펑펑 ‘울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울음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계 21:4)
하지만 그 변명이 통했으면 애초에 지옥에 가질 않았겠죠. “어허. 네가 그런 환경만 있었으면 정말로 죄 안 짓고 회개하고 구원도 받았을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불신과 죄가 하나님의 영적 디버깅을 통해 다 탄로나게 되면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도저히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죄인이 하늘로 가면 하늘이 하늘이 될 수가 없어집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여 2천여 년 전 육신을 입고 와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고 지옥에서 사흘 밤 낮 죄의 형벌까지 대신 받아 주었다. 그런데도 너는 선과 악을 분명히 판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을 사랑하며 살았고, 양심을 통해서, 또 주변의 모 형제나 모 사이트를 통해 n번이나 복음을 전해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고의로 거절했다.”
아마 흉악한 범죄자, 독재자뿐만 아니라 역대 교황, 이단 교주들, 세상에서 성인으로 추앙 받던 위인들까지 지옥에서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본디 하나님께 제일 먼저 반역하고 타락한 마귀와 그의 천사 녀석들을 집어넣으려고 만들어진 장소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마 25:41) 사람이 가라고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지구 내부를 열로 뜨겁게 달구고 영원한 지옥불을 켰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자기 의지로 제 발로 가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사탄 마귀와 그의 졸개들도 궁극적으로는 훗날 불못으로 던져질 정죄 받은 존재입니다. 성경은 지구 땅속에 초자연적인 이상한 괴물들이 있어서 훗날 대환란 때 하나님의 허락 하에 뛰쳐나올 거라고(계 9) 예고하고 있지만, 흔히 만화 전도지 같은 데에 그려진 것처럼 그들이 지옥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죄인들을 괴롭히고 고문하는 소위 ‘저승사자’ 역할을 한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자기도 그런 곳에 앞으로 떨어져 영원히 형벌 받을 텐데 주객이 바뀐 노릇이죠. 또한 그런 걸 묘사하고 있는 요즘 소위 지옥을 보고 왔다는 간증(?)은 결코 성경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지옥이 없다면 크리스천들은 바보같이 매주 밖에 뛰쳐나와 거리 설교를 할 필요도 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성가시게 굴 필요도 없으며, 아니 같이 아예 실컷 죄를 즐기면서 살다 하늘나라 가면 되지 이렇게 세상을 역행하면서 힘들게 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전산학으로 치면 P=NP임이 증명되고 NP를 P로 다항 시간만에 바꾸는 알고리즘이 발견된 것처럼 살면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이든 신약 시대이든, 북한이나 소말리아에서 굶어 죽은 애든, 혹은 한국이나 미국에서 인터넷 쓰면서 지낸 사람들이든 똑같이 하나님이 제시한 믿음의 대상을 믿어서 의롭게 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 대상이 오늘날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어차피 살인자와 간음자의 성품을 지니고 불가항적으로 태어난 죄인인 우리를 불가항적인 이유로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인하고(자살도 포함) 간음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 믿어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걸 지적으로 받아들일 능력조차 안 되는 아기, 저능아 등은 무조건 패스이고 죽으면 그냥 하늘나라 갑니다. 잘 교육 받고 교양과 학식을 갖추고서 착한 일 한 게 나쁜 일 한 것보다 더 많으면 구원 받는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어거지 잣대가 아닌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정녕 공평하고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한 번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고통의 장소 지옥은 참 생명이 있는 기독교만이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는 교리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증거하시지 않는 거짓 종교라면, 사람 겁 주고 기분 나쁘게 하는 이런 교리를 내세웠다가는 남아나질 못했겠죠.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예 혼의 멸절을 가르치고 천주교는 연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중간 장소를 내세워, 성경이 말하는 칼같이 명확한 내세의 개념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세를 앞두고 교회들조차, 생명력을 잃고 배도하고 타락하면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신학자 중에서 문자적인 지옥을 부정하는 똑똑한 바보들이 점차 늘고, 불신자들은 자기 욕망을 잘 긁어 주는 그런 거짓 교사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딤후 4:3-4).
세상은 어떻습니까? 지옥하고는 수준이 비교가 안 되는 곳에다 지옥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비유해서 씁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damn, hell 같은 단어는 영어에서는 거의 욕설로 쓰이고 있습니다. 부모, 가족, 친구가 지옥에 가지 않고 구원 받길 눈물로 기도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는 마당에, 이는 지옥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영적 실상입니다. 심지어 요즘 미디어에서는 착한 사람들밖에 없는 단조롭고 따분한 하늘 대신, 지옥이 더 화끈하고 신나고 재미있다는 이미지까지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내세의 지옥에 대한 관념이 무뎌질수록 현 세상이 갈수록 지옥처럼 변한다는 말은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옳은 말이며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아무리 죄인들이 기분 나쁜 지옥을 손바닥으로 가리려 해도 지옥은 엄연히 있습니다. 지옥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자유주의자들이 진정 당신의 혼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그나마 지금까지라도 유지되어 온 게 지옥이라는(심지어 불신자에게도 막연히)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저도 신이 기껏 창조해 놓은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는 개념이 별로 기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죄악을 보니 지옥이 없으면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을 절감하며, 나라도 지옥에 안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죄인이 지옥에 가는 것은 현 세상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형벌을 받고 감옥에 가는 것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불신자 중에는 지옥을 무슨 공갈 협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옥이 없다고 믿으면 그냥 그렇게 거부하고 귀 막으면 되지, 그게 왜 공갈 협박으로까지 들릴까요? 그런 사람들일수록 이 악한 세상에 대한 불평과 불신 원망은 꼭 제일 많이 하더군요. 지옥을 공갈 협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이 지경입니다. 또한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눈물과 고통, 울부짖음이 가득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고통은 이를 훨씬 더 능가할 것입니다.
각종 종교, 인격 수양, 교육 따위는 사람을 결코 바꿔 놓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구원의 길을 받아들여서 이 시간에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2009년 1월 27일
글쓴이: 김 용묵 형제'목자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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