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롬8:11
요절: 롬8:11
오늘은 성령과 부활에 대해서 증거 하겠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십자가의 전달자요,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증거의 능력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가르치도록 하십니다. 성령이야말로 부활의 증인이요, 부활의 동참자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가셨다가 시험을 받으시고 성령의 권능을 입고 돌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돌아가셨습니다. 이 진리는 좀처럼 잘 가르쳐지지 않는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 생애가 모두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주님의 죽으심 역시 성령을 통하여 드려졌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9:14).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성령을 통하여 드려지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렸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드리실 때 분명히 성령으로 드리셨고,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안에서 걸으라.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주님 자신의 몸이 향기로운 헌물이요, 희생물이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들이 드리는 염소나 양과 황소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주님의 십자가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집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성령이 행하신 일이 분명히 증거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이루신 성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과 부활의 관계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시고,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누구나 다 살리십니다. 첫 열매가 맺히면 곧 수확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모두 수확물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을 소망합니다. 부활은 산 소망이요, 영광스러운 소망입니다. 부활은 복된 소망입니다.
누가 이렇게 묻습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삽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삽니다. 성령을 통해 삽니다. 성령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분이십니다. 구약을 통해 이미 성령의 살리시는 역사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뼈들 위에 대언(代言)하여 그것들에게 이르기를,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의 말씀을 들으라. {주} [하나님]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숨을 너희 속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4~5). 이 기록은 부활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숨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면 살게 됩니다. 흙으로 만든 사람의 혼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을 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완전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 위로 숨을 내쉬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 위에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숨을 내쉬는 이 행위는 바로 생명의 창조 행위와 같습니다. 주님은 제자들 위로 숨을 내쉬셨는데 이는 곧 있게 될 성령의 강림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 위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시는 음성의 의미를 쉽게 알아 들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배경이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바람에게 대언하라. 바람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숨아, /사방의/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죽임 당한 자들 위에 숨을 불어 그들로 하여금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언하였더니 숨이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살아서 자기 발로 서는데 심히 큰 군대더라.] (겔 37:9~10). 성령은 생명의 숨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들 안에 들어오셔서 죽은 영을 살려 놓으시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성령 없이는 누구도 부활할 수 없고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주님의 부활이 없이는 누구도 부활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주님께서는 자신이 부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부활이라면 주님을 믿는 자는 곧 부활을 믿는 자요, 부활하게 되는 자란 말입니다. 부활이신 주님을 믿게 되면 그는 부활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죽어도 삽니다. 부활이신 주님을 믿으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부활은 죽음이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삼켜 놓아 봐야 다시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을 때는 죽음이 왕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최고였습니다. 부활이 없을 때는 죽으면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죽음은 중간 과정 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요 11:25)라고 하신 말씀은 ‘나는 죽었다가 부활한다. 나는 죽어도 부활할 것이다’는 정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활이요”란 말씀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계시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이시므로 부활이신 자신을 영접한 자들은 모두 부활의 소유자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가르침이나 교훈이나 교리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에 직결된 실제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 본질의 핵심입니다. 부활의 가르침을 받았고, 부활의 교리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이신 주님을 내 안에 영접해야만 합니다. 믿음으로 마음속에 모셔 들여야만 합니다. 주님은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우리 안에 살리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육체를 입으시고 오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살려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란 부활의 영이요, 살려 주는 영입니다. 이 영을 통해 먼저 죽은 영을 살리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란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 보십시오. 이 속에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귀한 보배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부활이십니다. 부활의 근원이시고, 본체이시며, 첫 열매가 되시며, 그 근거가 되십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위험이 닥쳐도 “죽을 뻔했다. 죽게 생겼다. 이러다가 죽겠다” 등등... 죽음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특히 한국은 복음이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반만년 역사 동안에 사망 권세에 완전히 종노릇 하였던지라 ‘죽음’이 문화가 되고 자연스럽게 의식 저변에 깔려 들어 언어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그래서 말끝마다 ‘죽겠다’를 연발합니다. 조금만 힘들면 ‘힘들어 죽겠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우면 ‘더워 죽겠다.’고 하고, 조금 추우면 ‘추워 죽겠다’, 굶으면 ‘배고파 죽겠다, 허기나 죽겠다’고 합니다. 성질이 나면 ‘짜증 나 죽겠다.’고 합니다. 이래도 죽겠다고 하고, 저렇게 해도 죽겠다고 합니다. 죽음에 매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활이신 주님이 들어오면 ‘죽겠다’는 말은 모두 사라집니다. 죽어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분 나빠 죽겠다가 아니라 기분 나빠도 산다. 배고파도 사다. 배 아파도 산다. 추워도 산다...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삽니다. ‘산다’란 말로 모두 맺음을 합니다. 죽어도 사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살아서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데 왜 죽습니까? 우리는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몸의 지체들을 죽이는 일 외에 죽음과 연관되는 일이 없습니다. 부활이신 주님을 통해 소망도 살아나고, 능력도 살아납니다. 지혜도 살아나고, 없던 것도 생겨납니다. 이것이 “나는 부활이요”란 의미입니다.
요즘 주위에는 몸이 아픈 분들이 많습니다. 교인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이외로 허약체질인지라 몸에 한 두 개의 병을 달고 있지 않는 사람이 드뭅니다. 멀쩡해 보여도 당뇨병이 있고, 성인병이 있고, 아토피 같은 피부염에다 위장이 좋지 않다, 간이 좋지 않다, 신장이 좋지 않다 등등 별별 병들이 많습니다. 교통사고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관절염에 기관지염에 ‘염’ 자 돌림의 병도 많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란 주님의 말씀은 어떤 최신 의학이나 약보다 뛰어난 치료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부활이신 주님, 생명이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지금까지도 믿어왔겠지만 병과 관련하여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부활이신 주님과 나의 교통사고 후유증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정말 상관없게 됩니다. 믿음은 링크입니다. 생명은 연결되어야 힘이 발휘됩니다. 머리와 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뿌리와 가지가 연결되어야 능력과 생명이 되듯이 여러분은 부활의 주님과 여러분의 몸의 병을 믿음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꼭 병만이 아닙니다. 사업이면 사업, 일이면 일, 문제면 문제를 연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결하면 거기서 능력이 나옵니다. 이전처럼 습관대로 ‘아파 죽겠다’고 말하지 말고 이제는 ‘아파도 살겠다’고 말하십시오. 내 안에 계신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이 나를 살리신다고 믿으십시오. 믿을 때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십시오. 부활은 권능입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부활은 먼 훗날에 재림 때에만 적용되는 교리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 삶에서 모든 사건, 모든 일에 다 적용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이미 영적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犯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이 역시 부활을 증거합니다.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고](골 2:13). 이 역시 부활입니다.
부활 신앙은 삶의 방식을 바꾸어 줍니다.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발걸음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서게 한 것은 부활의 주님이었습니다(눅24:13-17).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 그들의 발걸음은 실망과 낙담의 하향 길이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그들의 발걸음은 소망의 상향 길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세상으로 내려가느냐? 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느냐? 는 오직 부활이신 주님을 믿느냐? 그렇지 않으냐? 에 달려 있습니다. 무덤 문 앞에서 슬피 울던 막달라 마리아(요 20:14)를 보십시오. 그녀는 예수님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바르려고 이른 새벽 무덤을 찾아갔으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빈 무덤이었습니다. 무덤 문 앞에 엎드려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주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동산지 기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녀에게 “마리아야”(요 20:16)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때서야 마리아는 주님이 부활하신 줄을 알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러 제자들에게로 달렸습니다. 그녀는 슬피 울던 눈을 닦고 기쁜 소식을 전하러 보냄을 받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인생이 바뀌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나는 부활이요"라고 하신 주님을 만났는가? 그렇지 않은가? 에 달려 있습니다.
공포 속에서 떨고 있던 제자들(눅24:37)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만 알고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했던 제자들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두려움 속에서 떨며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담대한 복음의 전사들이요,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죽기를 두려워해 숨어있었지만 이제는 죽일 테면 죽이라는 식으로 담대했습니다.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목베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부류의 사람은 죽이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살인자가 된다)과 나 하나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자살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죽음 이후의 부활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죽는 것 겁 안 난다’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이신 주님을 만나면 ‘죽는 것 겁 안내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변화는 어디서 옵니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에서 옵니다. 성령은 우리를 부활의 주님 앞으로 인도하며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세우십니다. 부활이신 주님을 만난 성도들은 부활의 능력,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란 주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서 부활의 권능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현재적으로 소유하고 승리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살기 너무 힘들어”란 말 대신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인생이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은 생물학적, 육체적, 물리적인 생명에만 적용하는 것은 진리의 99%를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곳에는 어김없이 부활이 사용될 수 있으며, 적용될 수 있음을 선포하십시오. 언어의 사용 능력, 사고의 한계 능력이 닿는 한 모든 면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란 주님의 선포를 믿음으로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의 권능이 성령의 권능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요, 우리 주를 죽음에서 일어나게 한 부활의 영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주님은 자신을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이신 주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을 모두 살리십니다. 생명의 원수는 사망입니다. 생명을 노략질하고,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죽음’이란 원수입니다. 죽음만 없다면 좋겠지만 죽음으로 인해 생명은 허무합니다. 무릇 생명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게도 원수가 있고, 천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깁니다. 죽음의 권세와 권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은 죽음을 이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 (히 2:14~15). 부활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로써 죽음 아래 있던 인간들이 죽음을 이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모두 부활 신앙의 소유자들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이 성령으로 충만한 경우는 없습니다. 부활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부활의 영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살려 주는 영’이 바로 부활이신 주님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부활이시요, 생명이신 주님이십니다.
이제 약간 교리적인 면을 고찰해 보겠습니다. 역사상 죽었다가 스스로 다시 살아난 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죽은 자를 살리고, 엘리사 역시 죽은 사람을 살린 예가 있지만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었던 육신의 몸에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나사로도 무덤에서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 나왔지만 다시 죽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도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습니다. 야이로의 딸도 다시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살린 여자 아이도 죽었습니다. 바울이 살린 청년도 다시 죽었습니다. 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새로 태어난 것도 아니거니와 이전에 살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죽음으로 끊어졌던 육신의 생명이 연장된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위기에서 기도하여 15년간 더 살아난 것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죽음을 맛보았느냐 아니냐의 차이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인해 다시 살아났습니다. 스스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스스로 살아나셨는데 영적인 몸으로 일어나셨습니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까?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이 아들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드러나셨느니라.] (롬 1:3~4). 부활은 새로운 영적 탄생과 같습니다. 주님의 육신은 성령으로 다윗의 씨에서 나셨지만 주님의 부활의 몸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습니다.
주님의 육체적 출생도 성령으로 인한 것이요, 부활을 통한 영적 출생 역시 성령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권능은 성령의 권능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성령의 생명입니다. 성령은 주님을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성경은 분명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은 부활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없이는 성령의 임재가 없고,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을 받고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행4:33). 그들은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과 부활의 관계는 성령이 부활의 증인이 되시고, 부활을 강력하게 증거하게 하시는 분이란 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삼 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50일째에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같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뉴스 형식으로 전하여 믿을 사람은 믿고 말 사람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주님이 참 하나님이시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임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 역시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될 것임이라.] (롬6:5).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부활은 부활의 생활 방식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거든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愛着)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 ](골3:1-2).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들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땅에 속한 것, 세상에 속한 것, 육신에 속한 것, 썩을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저 하늘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은 저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진정으로 애정을 둘만한 것들이 모두 저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입게 될 영광스런 몸이 저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게 될 맨션도 저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교제하며 영원히 함께 살 주님과 성도들이 저 위에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저 위에 있습니다. 하늘의 거룩한 천사들이 저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받게 될 유업의 보상들이 저 위에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한 성도들이 누릴 특권입니다. 주님과 함께 일어난 성도들이 얻게 될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직접 경험했던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안에 그리스도를 일으킨 부활의 영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그 영을 주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성령이 저와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계신 성령입니다. 동일한 성령께서 동일한 일을 하십니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이란 말과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은 같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부활의 영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받기 전에 먼저 영의 부활을 경험하였습니다.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의 활동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았느니라.](골2:12). 이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영적 열매를 맺으며 살라는 뜻입니다. 몸이 부활하면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는 영적 부활을 경험한 자로서 부활의 권능을 소유한 삶의 증거와 열매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주님의 부활에 대한 더욱 깊은 조명과 풍성한 이해에 도달하게 하시고,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이 글은 2006, 1.25일 작성된 것을 수정한 것입니다.
작성.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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